귀가 큰 토끼를 아시나요
커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 수줍게 웃고 있는 토끼 한 마리. 이름은 '베니'입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만나셨을 수도 있고, MBC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마주친 적 있을 거예요.
이 토끼가 왜 귀가 그렇게 큰지 아시나요?
자기 대신 소리를 들어줄 친구가 필요했거든요.
베니를 그린 사람, 구작가(구경선) 님. 오늘은 이분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책 리뷰만은 아닙니다. 이 분이 우리 END NF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지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세상에 전해주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씁니다.
소리 없는 세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소녀
구작가님은 두 살 때 심한 열병을 앓은 뒤, 소리를 잃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한 소녀. 나중에야 자기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엄마의 입모양을 읽으며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엄마는 혀가 굳지 않도록 입술 주변에 설탕을 묻혀 혀를 움직이게 했고, 자기가 말할 때 목에 손을 가져다 대게 해서 소리를 익히도록 했다고 해요. 같은 단어를 수천 번이고 반복해서 알려준 엄마.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세상의 방패이자, 선생님이었던 엄마.
그리고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망막색소변성증.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유전성 질환. 결국에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고, 아직까지 완전한 치료법도 없는 병입니다. 소리를 잃은 뒤에, 이제 빛마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어요.
절망 대신 버킷리스트를 적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데 구작가님은 달랐어요. 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눈이 보이는 그날까지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소개팅 해보기. 헤어진 친구 찾기. 운전면허증 따기. 가족여행 가기.
대단하지 않은 소박한 일상들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행복합니다."
이 한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자신의 장애는 어쩌면 축복이자 기회라는 담담한 고백.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는 없었기에 더 감사할 수 있었고, 사용할 수 있는 감각들을 최대한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특별한 경험의 고백.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MBC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도 등장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내며 사랑과 희망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후의 이야기를 그려준 사람
여기서부터가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구작가님은 우리 END NF(신경섬유종증 환우회) 가족들에게 특별한 분입니다.
이전 글(#009)에서 저는 둘째 아들 지후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2008년에 태어나, 신경섬유종이라는 진단을 받고, 미국까지 오가며 치료제를 찾아 헤맨 이야기. 그 글에 삽입된 인스타툰,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까요?
그 인스타툰을 그려주신 분이 바로 구작가님입니다.
지후가 태어난 이야기, 병원에서 처음 진단받던 날, 6개월간 논문을 뒤지던 밤들, 미국의 닥터 켄트, 4년의 여정, 그리고 드디어 편히 잠드는 아이. 그 모든 장면들을 구작가님이 따뜻한 그림으로 담아주셨어요.
들리지 않고, 보이는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 분이. 우리 아이의 이야기를 한 컷 한 컷 정성스럽게 그려주셨습니다.
대국민 희귀·난치성질환 인식개선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인스타툰은, 많은 분들이 신경섬유종이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작가님의 그림이 가진 힘이었어요.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를 따뜻하게 전할 수 있는, 그 특별한 힘.
매번 우리 곁에 오시는 분
구작가님의 특별함은 인스타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END NF가 세미나를 열 때마다, 행사를 할 때마다, 구작가님은 늘 오십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불편하신 몸으로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리 곁에 와주십니다.
거창한 인사말을 하시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셔서, 회원분들 한 분 한 분 눈을 맞추시고, 따뜻하게 웃어주시고, 마음으로 안아주십니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 회원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분이 귀를 기울여주시고, 시야가 좁아지는 분이 우리를 바라봐 주시는 거예요. 그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구작가님은 희귀질환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본인이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안고 살아가시면서도, 같은 무게를 지고 사는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구작가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늘 함께 있는 분."
종양의 크기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이듯
#009 글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종양의 크기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구작가님을 보면 이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소리를 잃고, 빛을 잃어가면서도 멈추지 않는 분. 베니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책을 쓰고, 이모티콘을 만들고, 강연을 하고, 그리고 우리 END NF 회원들의 이야기를 그려주시는 분.
이 분의 삶 자체가 희망의 증거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라는 제목처럼, 구작가님은 매일매일 괜찮은 하루를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괜찮음을 우리에게도 나눠주고 계세요.
이 글을 읽으시는 END NF 회원분들께.
혹시 구작가님의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꼭 한 번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두꺼운 책이 아닙니다.
예쁜 베니 그림과 함께 천천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그림 에세이예요.
읽다 보면 느끼실 겁니다.
이 분이 왜 우리 곁에 와서 웃어주시는지.
왜 지후의 이야기를 그려주셨는지.
왜 매번 우리 행사에 오시는지.
같은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구작가님은 그 위로를 그림으로, 글로, 그리고 존재 자체로 건네주시는 분입니다.
구작가님, 항상 감사합니다.
우리 END NF 가족들은 작가님의 매일매일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이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